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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 희망이, 땅 위에 절망이: 앞으로도 계속 갖는 희망과 이제 아무도 오지 않는 객석 사이에서 쓴 글

콘노 유키

조선통신사 월간소식 제12회 2021년 7월호

정유진 «해적판미래+인간백해무익가든» (아트선재센터 지하극장, 2019.12.12-15)

# “몇 년이 지나도..” “세기가 변해도…”

권한이 이미 주어진 미래가 있다. 가능성들을 선취 및 선별하여 조건 짓는 기념 행위: 추모식, 기념 행사, 올림픽, 기타 등등. 우리가 바라는 일보다 훨씬 먼 시점(時点)까지 갈 때, 기념 행위는 단단한 돌에 새겨진 기록물과 상징적으로 손을 잡는다―궁극적으로는 둘 다 지속성(duration)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려고 하는 태도이다.

 

# 해적판? 미래?

해적 행위는 합의된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을 통해서 물품을 얻는다. 이 행위란 위험을 무릅쓰고―거센 파도에서 알 수 없는 바이러스까지―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무릅쓰고 획득하고 싶어하는 미래란 무엇일까. ‘해적판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시제 구분과 해적판 행위―일반적으로 말하는 해적들의 행위와 구분하고자 이 표현을 쓰겠다―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말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에서 해적판 행위는 어떻게 각각 나타날지 비교해보아야 한다.
먼저 해적판 행위의 특성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법률상의 권리를 무시하고 2.권한 없는 이에 의해서 허가 없이 대상을 판매 및 유통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해적의 약탈, 즉 물품의 유통과 달리 3.유통 과정에 허가 없는 생산 행위, 즉 복제가 추가되는 점이다. 약탈자는 이제 물품의 실물 대신 상징적인 차원에서 약탈을 범함과 동시에 생산자가 된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해적판 행위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내용을 바탕으로 볼 때, 권한이 주어진 미래를 불법으로 복제하여 유통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끊임없는 쇄신 속에 들어가버리는 것과 달리,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재해석과도 달리, 해적판 행위는 미래 시점을 상정할 때 더 유의미하다. 여기서―사실 ‘저기서’―권한은 미래에 대해 열린, 양가적으로 지속성을 바라는 태도이다. 기념 행위의 한쪽에는 모조리 사라진다는 또 하나의 선별된 가능성이 선취되어 있다.
권한을 건드리는 행위는 과거 시제에서는 재독해나 재해석을 허용/허락 받고, 현재 시제에서는 사건 생성의 연속 때문에 그 순간성에 권한이 주어진다. 단선적인 역사는 재검토의 대상이 되면서 가닥이 풀리고 현재는 잇달음의 생성에 가치 중심이 놓인다면, 미래에 대한 해적판 행위는 과거의 쇄신이나 현재의 생성처럼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해적판 행위는 그려져 있거나 아예 그리지 못하는 약속을 선취하여 ‘복제’하는 일이다. 우리가 생성하기 전에 있고, 주어진 것들을 재해석하기 전에 있는 원본성이 바로 양가적 긍정성을 수용한, 이미 약속된 미래이다.

 

# 진짜 같은 픽션? 농담 같은 현실?

기념 행위를 통해서 미래는 가리켜지고 약속을 보증 받는다. 미래에 대한 해적판 행위는 이 약속을 폐기하지도 전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언뜻 보면 기념 행위와 해적판 행위의 결과물은 (복제 생산을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물론 열화나 스탬프 표시를 통해 원본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있을 것 같은 허구를 만드는 구조와 달리, 앞으로 있을 것이 가짜 같이 느껴지는 상황―가령 2020년에 계획된 올림픽에서 정부가 미리 선보인 머리에 쓰는 우산처럼1―에서 차이를 따지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원본-복제의 차이에 따른 서열을 따지는 일은 거의 무의미해 보인다. 그대신 우리는 작성자에 따른 차이를, 말하자면 저자와 재생산자의 입장에 따른 차이를 바탕으로 지속성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저자에 의한 확고한 영원성의 경우와 달리, 재생산자에 의한 증식에서 지속성은 한시적이다. 저자와 재생산자의 서명이 드러나지 않을 때 둘은 구별할 수 없지만, 원본-복제 차이에 따른 서열 대신 지속성의 차이에 따라 우리는 해적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재생산자의 해적판 행위에 의해 선취된 결과는 스스로 약속된 미래가 되고 싶어한다. 그 결과 증식된 미래상은 저자의 이름으로 안정적으로 기약하는 미래에 등치되는(동등한 가치로, 동등하게 배치되는) 것이 되려고 한다. 기념 행위의 안정된 구조―저자의 이름으로 기약한 양가적 미래, 즉 한편에 지속 불가능한 서사를, 다른 한편에 “밝은 미래” 같은 희망적이고 지속 가능한 서사를 놓은―에, 재생산자 입장―재생산자에게 이름은 대부분 익명 또는 가명이다―에서 미래를 올려놓아 포화시킨다. 거센 파도와 바이러스처럼 변수가 들어가는 해적판 행위, 그 복제-생산의 결과, 약속된 미래의 양가성을 포착하면서 동시에 양가성 사이의 떼려고 해봤자 뗄 수 없는 관계를 제시한다―치달을 수밖에 없는, 도달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라는 공통분모. 저자의 이름으로 그려진 기념일과 그려내지 못한 황폐해진 미래상은 미래에 도달하는 두 가지, 그러나 약속된 미래라는 공통분모에 같이 뿌리를 두고 있다.

# 전시 «해적판미래+인간백해무익가든»

미래의 양가적 긍정성은 정유진의 개인전 «해적판미래+인간백해무익가든»(아트선재센터 지하극장, 2019)에서 영상 작업 <해적판 미래>와 설치 작업 <인간백해무익가든>을 통해서 나타난다. 영상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희망과 지하 극장에서 인간의 자리를 점유한 풀들은 각각 그리기 쉬운 미래의 모습이다. 이때 땅 위의 희망과 지상의 풀들은 머무는 자리가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삶의 터전을 쫓겨 도피한 이들(체르노빌과 동북대지진 원전 사고의 경험자들)과 미래의 원본성 또는 삶의 토착성은 공통적으로 모두 내려앉을 데를 찾는다. 단지 시간적 지속과 이 지속에 의한 생성이나 성장의 차이일 뿐 쫓겨났든 처음부터 있는 위치든 간에 지상에 붙박혀 있다.

이 붙박혀 있음은 미래에 대한 양가적 긍정성 그 자체이자 동시에 우거진 식물 너머 객석에서 영상을 보는 감상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두 가지 시나리오로 완성된 미래를 해적판 행위를 통해 보게 된다. 복사본으로 도착한 미래, 이미 있는 원본에서 권한을―그것의 폐기 아닌―불법적으로 ‘획득한’ 미래는 합법적인 미래의 현시에 절망과 희망의 복합성을 들여다본다. 이 땅에 붙박혀 있는 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희망과 절망은 일렁거린다. 내세워진 미래의 일방적인 긍정성―희망, 밝은, 등의―과 더 이상 인간이 개재할 수 없는 시공간축을 거부하진 않으면서, 우리는 시간이 다 지나면 자리를 떠나야 하고 방해되는 조건 속에서 일정 시간 흘러가는 영상을 객석에서 보고, 후세(미래)에 대한 대비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일에 어떨 때는 기뻐하고 어떨 때는 슬퍼하는 현재 모습을 스크린 화면에서 보게 된다.

전시 «해적판미래+인간백해무익가든»는 이런 일렁거림, 즉 미래의 양가성이라는 지평에서 안착할 수 없는 경험을 전시장에 시공간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머무는 자리와 떠나야 하는 자리는 분명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안정적으로 계속―오래도록―있을 수는 없다. 인간이 없어진 후의 모습이 떠올리는 <인간백해무익가든>와 삶의 희망을 말하는 <해적판 미래>를 볼 때, 우리가 선취하는 시나리오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 동일화되지 않은 채 경험되고 금방 사라진다.

# 지상-지평에서 우리가 바라(다)보는 것들

시선을 가리는 풀 사이에서 본 영상 마지막 장면에 불꽃놀이가 등장한다. 보다가 금방 주변은 밝아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 극장을 나선다. 이 불꽃놀이는 사실상 원전 사고와 아무 관련이 없는 기록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장면을 보고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인터뷰 내용이나 충격적인 영상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지만―우리가 보던 빛, 즉 불꽃놀이와 영상의 한시성이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모든 것들―원전 사고의 정체는 물론, 작품의 허구와 사실의 관계도2―을 밝히고 보여주는 빛이 아니라 일렁거리는 빛이다.

불꽃놀이를 쓰나미 피해를 입은 폐교 장면처럼 하늘에서 드론으로 찍었다면 어땠을까?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점―동북대지진 관련 뉴스에서 많이 본 구도이기도 하다―과 달리, 우리―촬영자, 불꽃놀이에 홀리듯 보는 사람들, 그리고 관객―는 지상에 있다. 지상의 덧없음은 생기와 소멸을, 과거와 미래, 이곳과 저곳을 껴안는 양가적―이라는 절대적―긍정성에 비춰진 결과이다. 일고 사라짐―단지 비유만은 아니다―을 납작하게 보는 대신, 우리는 그 생기하는 지평에 서 있다. 이 절대적 긍정성 사이에서 이동하는 일, 그것이 해적판 행위가 미래를 향해 범하는 일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다시 믿음의 태도로 ‘다시’ 돌아오도록 한다. 안일하게 도달해버린 미래 대신, 우리가 ‘현재에’ 믿고 사는 일을 향해 돌아오도록 해적판 행위는 걸음한다.

# 결국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일, 그리고

해적판 행위는 미래의 양가성 중 어느 한편으로 귀결되거나 정착할 일 없이 미래에 대한 절대적 긍정성으로 바꾼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거나 인간의 기쁨으로 충만한 미래상을 동시에 열어놓는다. 이는 지금 상황과 대비되는 미래상을 한 번에 껴안는, 시제적으로 갈라진 현재를 대하는 태도이다. 현실 도피의 망상적 결과 대신 미래에 미리 도피해버린 현실을 우리―저자가 아닌, 불꽃놀이 관객, 전시장의 관객, 그리고 어느 누구라고 대표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삶 속에―의 믿음 속에 숨쉴 수 있도록 바꾼다. 바람 혹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어쩌면 허물 같은 망상이나 이미지에 기대를 거는 태도로 믿고 ‘사는’ 일―결국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그리고 ‘다시’ 미래로 출발하는 일.

1 – https://www.asahi.com/articles/ASM7Y3VPHM7YUTIL00X.html

2 – 가령 영상에서 등장하는 붕괴된 건물은 재난 센터에서 대피훈련 경험으로 세팅된 공간과 실제로 피해 지역에서 촬영한 장면이 둘 다 등장하고, 설치 작업의 식물 중에는 가짜 풀(녹색)도 실제 풀(죽은가지)도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