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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s
재난의 비경(秘境)

염하연
월간미술 2021년 3월호

정유진, 코바야시 타이요 «해류병» (시청각 랩, 2021.1.6 - 2.7)

타인의 고통과 재난을 말할 때, 언어와 예술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혔다. 재현이라는 예술의 숙명은 종종 타인의 불행에 대한 방관으로 오독되었다.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대안이 없는 연민은 부적절한 것으로 의심받거나 윤리적 강박과 침묵이 되었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재난은 더 무신경하고 무자비하다. 우리는 검은 화면의 숲에서 솟아나는 재난의 이미지와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익명의 데이터 뭉텅이들을 일상적으로 마주한다. 이제 재난은 미리보기, 섬네일, 허접쓰레기, 떠도는 이미지로서 무료 배포1된다. 매체의 범람과 함께 온라인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재난의 재현에 관한 새로운 논쟁이 요청되고 있는 셈인데, 그래서 바로 지금 예술은 재난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정유진은 재난을 기록할 뿐 아니라 ‘재난이 되어버린 재현’, 즉 세계가 방관하거나 소비하고 있는 재난을 말한다. 〈해적판 미래〉(2019)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와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누출 사고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작가는 방사능 피폭 위험 지역에 직접 발을 디디지만 타인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동기화되는 대신 적절한 거리두기를 택한다. 체르노빌의 폐허를 테마파크처럼 소비하는 모습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현지에 방문해야 하고, 그곳이 아무리 조야한 관광지가 되더라도 비극의 편린은 남기 마련”이라고 언급한 아즈마 히로키의 일견 타당한 의견2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미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방사능 오염 지역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인터뷰에서는 재난이 남긴 폐허가 언젠가 정상궤도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도 함께 읽힌다. 철저한 현장고증만을 남기고 극적인 연출의 잔가지는 모두 쳐낸 다큐멘터리의 건조함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예술의 숙명을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잊혀가는 타인의 고통을 실체화한다.

 

종말은 시각매체에서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 중 하나였고, 언제나새로운세계를 품은 미지의 폐허로서 우리를 압도해 왔다. 스펙터클한 종말을 마주할 때 가슴에서 요동치는 숭고미는 작가의 설치작업에서 해소된다. 작가가 보여주는 큰 스케일의 설치는 특정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기보다는 묵시록적이고 제의적인 세계관으로 쌓아 올린 가상의 재난으로서, 쉽게 유추할 수 없는 소재와 색이 결합된 생명체처럼 보인다. 코바야시 타이요와 함께 한 2인전 〈해류병〉(2021)에서 작가는 고장난 노트북에 두껍게 쌓여있던 더미 데이터의 장례식을 치렀다.재난을 말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재난의 귀퉁이들은 조각작업 〈Funeral of Eugeene95’s Macbook Pro〉(2021)로 다시 응축된다. 작가의 재난은 마치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처럼 몸집을 불렸다가 작아지고, 사라졌다가 결합되기를 반복하며 방관자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새겨지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재난이 반성 없이 잊히고 피해자들의 삶이 삭제되는 것처럼 작업도 전시장에서의 역할이 다하면 제 한 몸 누일 곳이 없어진다. 다행히도, 폭발 당시의 불꽃을 연상시키는 조각 〈무자비둥〉(2019)과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종이벽돌로 만들어진 〈폭삭벽〉(2017)은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취미가의 〈숏서킷〉(2021)에서 해체되어 다시 공개되었다.

 

인터넷이 빈곤한 이미지의 홍수를 만들었듯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인류에게 재난은 공통분모가 되었다. 타지와 타인의 재난을 서술해 온 작가는 이제 모두에게 개인적인 경험이 된 이 새로운 재난의 비경(秘境)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1 –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워크룸 2016 p.41

2 – 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북노마드 2016 p.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