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화
보스토크 21호 2020년 5월
올해 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WHO가 팬데믹을 선포한 것이 3월 12일, 일본 정부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도쿄 올림픽 개최 연기를 합의한 것이 3월 25일이었다. 이 무렵 80년대 애니 메이션 <아키라>의 한 장면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말과 함께 인터넷을 떠돌았다. 공사장 가림막에 “제30회 도쿄 올림픽. 개최까지 앞으로 147일. 국민의힘으로 성공시키자.”라는 광고판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에 “분쇄”, “중지다, 중지!”라는 낙서가 적혀 있는 장면이다. 처음에 <아키라>는 2020년 미래의 도쿄에서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는 작중 설정이 현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지만, 실제 올림픽 개 최 예정일로부터 147일 전이었던 2월 28일에는 이미 성공적인 개최가 불가능해 보이는 오늘의 상황을 예언한 것으로 그 의미가 반전되고 있었다. 이것이 실제로 개최 연기가 확정된 다음부터는 그저 불길하고 나 불온한 것이 아니라 충격적으로 정확한 예언으로 포장되어 전파된 것이었다.
예언은 예측과 다르다. 이를테면 정유진의 <해적판 미래>에서 작가가 인터뷰한 일본인 미술가가 “실제로 올림픽은 내년인데,”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엄밀히 예측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당시 시점에서 2020 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미래였고 그에 따라 현재가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미래가 취소된 지금 시점에서 그는 단순히 틀린 예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틀어진 시간의 저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시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미래가 변하면 현재와 과거도 함께 변한다. 우리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나 이미 확정된 사 실처럼 간주되는 예측과 예정 속에서 살아간다. 예정된 행사가 취소되고 업무 계획이 반복해서 지연되지 만 다시 계획을 세우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예측도 어려워질 때, 그래서 미래가 일방적으로 밀려들고 나가기를 반복할 때 현재는 해변의 모래성처럼 허약해진다.
이렇게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재를 잠식하면 예언이 힘을 얻는다. 예언은 선명하게 미래를 그린다는 점에 서 확률적 예측보다도 오히려 계획적 예정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예언자는 계획자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이야기 또는 장면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러한 픽션은 미래를 결정하고 실현할 수 있는 어떤 전능한 자의 ‘계시’로 여겨질 수도 있고, 그런 힘이 없는 가장 무력한 자의 강렬하고 감염성 높은 열망으로서 저주나 축복의 ‘기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아키라>의 예언은 계시도 기원도 아니었다. 원래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는 1988년 도쿄에서 원인불명의 폭발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설 정 하에 2020년 올림픽을 준비하는 근미래의 네오 도쿄가 전쟁 무기로 양성된 초능력자들의 폭주로 또다시 파괴되는 모습을 그렸다. 그것은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후의 혼란과 재건 계획의 정점이었던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이르는 시간을 미래로 뒤틀어 투영한 것이었다. 역사가 반복되지만 완전히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음으로써 가능해지는 불확정적인 미래의 기억이 있다. <해적판 미래>가 촉발하고 점유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미래의 차원이다.
그림자 형태의 재난
기본적으로 <해적판 미래>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와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 발 전소 누출 사고를 현재 시점에서 교차해 보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2019년 당시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를 1945년 원폭 투하와 동일시하는 듯이, 또는 적어도 전후의 폐허에서 재건에 성공했던 과거를 미래에 다 시 한번 반복하려는 듯이 2020년 도쿄 올림픽과 2025년 오사카 엑스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화는 1960년대의 일본이나 그것을 파국적으로 고쳐 그린 1980년대의 SF적 이미지보다도 차라리 체르 노빌에 오늘날의 시간을 비춰볼 것을 제안한다. 가장 대표적이고 치명적인 원전 사고 현장이었던 체르노 빌은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재난의 원인을 불문하고 그것의 영웅적 극복을 강조하는 재건의 미학이나 그것에 의한 절멸의 가능성을 향유하는 파국의 미학은 양쪽 모두 강력한 힘을 물신화하고 이미지를 그런 힘의 기념비로 동원한다. 그러나 작가가 방문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재난의 스펙터클로 환원되지 않는 느리고 넓은 시간들 속에 머 물러 있다. 머무른다고 해서 완전히 멈춰 있다는 말은 아니다. 카메라로 비치는 모든 것은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변해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 물질, 들판을 뒤덮은 토사와 건물의 잔해, 그 위로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무, 그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곳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각자의 시계를 내장한 채로 직접 만나거나 멀리서 연결된다. 그런 관계망들이 이루는 복합적 시간은 하나의 총체적 시대로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뜨개질을 하듯이 서로 다른 시간의 노선들을 이어 붙이는 매개적 작업을 통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가로지르며 재난의 그림자가 만연한 것을 목격하지 만 그것을 시대적 증후로 서둘러 일반화하기 전에 그 그림자의 얼룩덜룩함을 유심히 살핀다.
위험은 불균질하게 분포한다. 예를 들어 같은 체르노빌이라도 출입 금지구역 바깥으로 이주하기를 거부하며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주민들, 출입 금지구역에서 상대적으로 방사선 수치가 낮은 곳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지역민들, 미디어로만 접한 비일상적인 위험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그곳에 오는 관광객들, 원자력 발전의 위험과 사고의 장기적 후유증을 알리면서 대책을 요구하는 전문가들이 느끼는 위험의 정도와 색 채는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체르노빌 사고를 제대로 해명하여 사회적으로 납득시키고 철저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또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이때 체르노빌은 후쿠시마의 과거다). 하지만 후쿠시마의 사고 현장 일대를 출입 금지구역으로 묶어서 사회로부터 배제하고 일사불란한 재건을 꾀하는 일본의 상황에서, 체르노빌의 활기찬 모습은 사고 지역이 오 랜 고립 끝에 천천히 회복되어 사회의 일부로 재통합되는 긍정적인 과정의 일부로 독해될 수도 있다.
한편 피폭의 경험이 없는 서울의 시점에서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로 이어지는 재난의 연쇄를 일회성의 뉴 스 영상이나 그것을 닮은 재난 영화 또는 게임 콘텐츠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현실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 요 컨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서울의 미래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이미 도래한 재난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재난, 하나의 장소가 파괴되는 폭발적 사건과 사람들의 기대 수명이 단축되는 확률적 죽음 사이에서, 미래의 위험은 확정할 수 없지만 간과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현재를 휘저어 놓는다. 정유 진은 이렇게 그림자 형태의 재난이 시야를 불길하게 흐리는 상태,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비결정적으로 비 추면서 신기루처럼 현재에 출몰하는 상태를 오늘날의 공기로 받아들인다. 손을 휘저어 간단히 떨쳐낼 수 없는 그 공기 속에서 재난은 때로 아주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보이고 또 때로는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어쨌든 그것이 저기 있음을 가리켜 보이고 어떻게 보이는지 묻고 싶어 한다.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기
<해적판 미래>는 주로 우크라이나와 일본에서 촬영한 영상과 시각 자료,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재난에 관여하거나 그에 휘말린 현지인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을 다루는 미디어에서 잘 다루지 않거나 특정한 의미의 프레임에 가둬 버리는 것들을 섬세하게 보여주려고 애쓰지만, 그것을 진짜 현실로 제시하기보다 자기 자신도 미디어 이미지의 연쇄 속에 있음을 계속 상기시킨다. 미디어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 서 유동한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의 게임 개발사에서 체르노빌을 배경으로 만든 게임 <스토커> 시리즈를 접하고 체르노빌에 방문한 관광객이 보는 풍경은 여러 가지로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이미지와 실제 풍경이 서로를 흉내 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관광객 자신이 스크린 속 풍경을 되새기며 실제 풍경을 보고 있다. 그 장소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 그 현실의 이미지를 ‘세상에 이런 일이’ 풍의 장르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단순히 이미지를 잘 만드는 것의 문제를 넘어선다.
작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 관객 스스로 실감하고 또 어느 정도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 겼다. <해적판 미래>는 무대와 객석 전체를 무성한 인조 식물들로 뒤덮어 마치 인류 멸망 이후의 영화관처럼 조성한 설치 작업 <인간 백해무익 가든> 내부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가짜라고 하면 가짜이고 진짜 같다 고 하면 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미래적 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우리가 누구이며 언제 어디에 있는가는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빈칸은 관객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적 세계로 이끌 수도 있었지만 2019년 서울의 공식적인 서사에 갇히지 않는 어떤 각본 없는 시공간으로 미끄러지게 할 수도 있었다. 재난의 그림자는 이미 일어난 일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이르기까지 객관적 현실로 간주되는 일련의 시간선들, 그 정도의 확실성을 획득하지 못한 예감과 기억의 단편들, 그런 흐릿한 형상마저 부여받지 못 한 비가시적인 것들의 돌발적 표출이 경합하는 새로운 시간의 지형을 불러일으켰다. <인간백해무익가든> 속에서 <해적판 미래>는 그 불투명하고 다중적인 흐름을 헤엄쳐 가는 감각을 증폭시켜 보려고 했다.
전 세계의 영화제와 각종 페스티벌들이 취소되고 상영회와 작가와의 대화가 모두 비디오 스트리밍과 원격 컨퍼런스로 대체된 지금 시점에서, 《해적판 미래+인간백해무익가든》의 전시 전경은 당시로서는 예측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다시 여러 겹의 상으로 분산된다. 한편에서 스크린 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으려 했던 것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몸과 그것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의 미래가 급격히 불투명해졌다. 다른 한편에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과 싸우는 일은 한층 더 절박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불확실성이 이미 넘쳐나는 상황에서 예술이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동어반복이거나 불필요 한 잉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장소이자 위험이 증폭되는 장소로서 우리 자신의 몸이 개별적으로 격리되었을 때,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로 이전보다 더 과격하게 자신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잠정적인 말과 이미지들과 씨름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종식이나 승리를 말할 수 없는 그림자 형태의 재난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전면화된 세계에서 <해적판 미래>는 기묘한 리얼리즘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충격적인 미래 예언’이 아니며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모여있는 영화 속 장면들이 이미 조금은 낯선 과거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언제라고 확정할 수 없는 그 시간 속에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