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an Biennale 2024

2024. 08. 17. – 10. 20.

 

Texts
검은 포장지와 정유진

현시원

≪RUN≫ (2022, 뮤지엄헤드)

1.
영화없는 극장, ≪RUN≫ 

 

정유진 개인전 ≪RUN≫은 흡사 ‘영화 없는 극장’ 같다. 그것은 ‘맥북 95 없는 테이블’이며 ‘점쟁이 문어가 없는 미래’다. ‘파국 없는 재난’이다. 정유진은 질문을 하고 떠나며, 다시 왔다가 다른 언어로 말한다. 덜컹거리는 차를 야밤 운전하며 야반도주하듯 신발끈 풀린 채 서울 거리를 걷는다. 바쁜 것일까, 정신 산만한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통칭해 그는 그가 만든 어떤 ‘이상한 학원¹(한국의 시스템)’에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체와 맥락, 사건과 시공(환경) 간의 부조화는 정유진이 작업을 하는 원동력이다. 2022년 여름 ≪RUN≫의 전시장에는 무엇이 있는지부터 보자. «RUN»의 구조는 도망, 안착, 테마파크, 카페, 극장, 전시 공간을 ‘편집(edit)’한다. 여기서 하나의 영화는 상영되지 않는다. 이곳은 ‘보는 주체’를 상정한 ‘편집된 공간’이다. 작가는 보는 환경으로서의 전시장을 조율하고, 개별 작업의 공간적 타임라인을 조율한다. 영화 없는 극장이라고 했을 때 ‘영화’는 무엇인가. 그것(영화나 맥북)이 꼭 정유진이 현재 몰두하고 있는 매체인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또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짤방으로 구성된 이미지, 부동산 유튜브 렉처 맛집 그 무엇이든 무관하다. 


큐레이터 권혁규가 적었듯² 이 전시장은 “어설프고 한시적인 위장술”의 총체다. 작가가 만든 도면, 스케일이 축소된 모형에서도 볼 수 있듯 공간과 작품의 배치가 중요하다. 이 배치는 정유진의 만화적 계획과 선언적 제목의 몽타주를 보여준다. 그가 제목에서 다루는 단어들은 주로 앞뒤 반전을 이루며, 함께 존재하기 힘든 것들을 연결한다. ‘자라는 묘비’나 ‘무자비둥’ 등 처럼 말이다. 공간과 개별 작품의 관계 또한 형식적 차원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RUN≫에서 개별 작품은 전시공간 내외부를 적절히 인식하며 배치된다. 계획과 선언이 공존하고, 만화적 상상과 추상성의 외피를 입은 가벼운 물질의 설치가 자리한다. 뮤지엄헤드 앞으로 가자. 작가의 핑크빛 깃발은 건물의 외부에 걸려 있다. 앞마당의 설치물들은 제주도의 ‘돌 박물관’이나 다른 나라의 민속박물관 앞마당처럼 연출되었다. 두꺼운 종이와 얇은 합판, 오랜 시간을 버틴 것처럼 보이는 흔적 취향과 인스턴트 정신으로 무장한 휘발의 감각이 공존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들이 전시 공간 앞면을 차지한다. 공간 뒤로 가보자. 위장이라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근래의 폭우를 피할 수 있을 듯, 안전해 보이기마저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해외 배송된 포대가 쌓인 <Dead end>(2022)이다. 이 작업은 육중한 배경화면 그 자체다. 배경화면 역할을 하기에 비대한 것들. 그러나 인프라스트럭처인 고속도로나 인터넷 통신망과 같이 기본이 되어버린 것들이다.  포대 자루는 전쟁이 일어나는 2022년 현실의 실제 리얼리티이자 ‘특정한 정보값’을 망실한 배경막이다. 무대 연출로서는 ‘투 머치 과잉’인 2018년의 평창 비엔날레에 등장했던 조류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묻게 되는 질문은 ‘여기 어디지?’ ‘재난과 나의 거리는?’ 등등이다. 총체적으로는, 배경화면 치고는 너무 육중한 무엇이다. 부조화와 비균질성이 뒤로 숨기는커녕 포장의 미학이 된 시대에 정유진의 만들기 과정은 너무 많은 땀과 육체노동을 부른다. 

 

정유진의 ≪RUN≫을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극장 같다고 말하게 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바로 작가의 과거 작업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실제 그는 비디오 작업과 극장을 작업 재료로 다뤄왔다. 특히 필자에게는 상영 환경으로서의 ‘상영관’을 만든 것이 중요하다. 2019년 아트선재센터 아트홀에서 열린 그의 ≪해적판 미래 + 인간백해무익가든≫ (2019, 아트선재센터 아트홀)를 떠올리자.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관리 불가능해 보였던 녹색 나무들이 가득했던 전시장을 기억한다. 영화 <해적판 미래>가 상영되는 48분의 시간 동안 영화는 ‘단채널 비디오’가 아니었다. 영화 바깥으로 나온 폭죽 소리, 내가 찍은 스마트폰 화면이 흔들린 건지 당시 작은 지진이 일어난 건지 헷갈릴 만큼 정유진이 밀어붙여서 만든 ‘못 보던 공간’이 있었다. 관객들은 설치된 작업들 사이를 헤집고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극장 관객석의 엄중한 존치 속에서 그의 부호 ‘+’는 중요한 단서다. 

 

이번 전시 제목에는 느낌표는 없다. 그러나 전시를 보고 나온 후 머릿속에서부터 나는 깃발을 하나의 느낌표(!)로 느꼈던 듯하다. 아니면 물음표였을까? 한여름 땀방울 속에서 이리저리 이동하고, 동시대 문제 지역을 찾아다닌 정유진의 결과물은 미술인 동시에 탐사 보고서처럼 보인다. 미술인척 하는 외피를 둘러싼, 현실의 잔해들이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 +가 설치 <인간백해무익가든>과 영화 <해적판 미래>의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정유진의 ‘런(Run)’은 관객을 어디로 어떻게 부르는 것일까? 아트선재센터 아트홀 극장의 관객석을 침투해버린 정유진의 겁 없는 설치는 영화 관람을 산만하게 방해했으며, 관객의 시각을 교란했다. 이번 여름 전시장 천정에 있던 작업 <I•SMILE•U>(2022)과 유사하다. 천정으로 향한 시선은 뮤지엄헤드의 통유리 창으로 반사된다. ≪RUN≫에서 정유진은 영화를 만드는 감각으로 공간의 동선을 조율한 듯하다. 즉 정유진에게 영화와 극장은 서로를 넘나들고 침투한다. 2019년 정유진의 극장은 영화의 온전한 집중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이처럼 전시장 뮤지엄헤드 또한 개별 작품의 ‘고정된 자리’를 찾는 곳이 아닌 탈주 자체를 물질화하는 시공간이 된다.

 

2.

정유진 맥북 95, 개인과 사회

 

정유진은 자신을 타자화하는 유머를 종종 구사한다. 재료를 산만하게 배치해두고 오므리며, 전시장에 와서 더 크게 펼친다. 바닥에 무엇인가 박고 관객들에게 앉아있을 수 있게 한다. 작가 정유진은 <Funeral of Eugeene95’s MacBook Pro>에서 자신의 탄생 연도를 그가 사용하던 컴퓨터 뒤에 붙였다. 지역 특산물과 산업물에는 제작 연도가 붙지만 통상 일상에서는 사람 뒤에 출생 연도가 쉬 붙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온라인과 기록, 생활 정보 유통 경제 모든 것이 맥북(노트북)과 핸드폰 안에 있다. 사고하고 훈련받고 답장하는 데 노트북 전원이 안 들어오면 그것은 ‘재앙’이다. 작가가 사용하던 맥북은 그의 전시장이자 극장, 테마파크이자 은행이며, 미래와 과거가 살아있는 인공적 삶 그 자체(였)다. 맥북의 파일을 다 날려버린 어느 날, 작가는 맥북의 사망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 “좌식형 동선”의 시공 안에서 전시장에 배치된 작품은 테이블을 겸하는 의자였고 사물의 관이자, 사람의 임시 거쳐였다. 정유진이 만든 의자는 2인전의 다른 작가 코바야시 타이요(小林太陽)의 영상 작업을 보게 하는 관객석이기도 했다. 

 

맥북의 사망은 하나의 이야기다. 정유진의 작업에서 매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 만들기의 충동이다. 평론가 윤원화, 콘노 유키 또한 글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논했다. 이제껏 정유진이 ‘재난’과 파국의 대상을 논하고 있음은 자주 이야기되어왔다. 그가 작업의 출발점이자 단서로 가져오는 현실의 존재들은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 파생된 경우가 많았다. 점쟁이 문어, 재난의 시공간과 주체들, 하물며 오랫동안 사용했던 자신의 맥북이 고장 난 순간까지 그것은 하나씩마다 다른 작업이 되었다. 점쟁이 문어의 모티브는 <점쟁이 문어 파울의 부활>(2019)로, 맥북의 재난은 2021년 시청각랩에서 열린 ≪해류병≫에서의 새하얀 테이블과 유사-관으로 재탄생했다. 그가 관심 있는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물질성과 결합하는가. 분명한 것은 그가 재난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95년 생 여성 작가의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으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가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2021년 초 ≪해류병≫의 두 작가 정유진과 코바야시 타이요에게 열 개의 질문을 던졌다. ‘eugeene95’를 사용했던 작가에게 시각 이미지로 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중 일 부분만 질문과 답을 가져와보자.

 

첫째, 예술가로서 자신들이 태어난 해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둘째, 파국이란 공통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개인에게 느껴지는 파국의 개별성이 더 중요합니까.


셋째, 정유진 작가의 경우 ‘노트북 이미지’를 ‘바탕화면용 이미지’로 만들었던 적 있습니다. 바탕화면에 바탕화면 이미지를 깐 것이죠. 늘 하려던 것들을 빨리하는 편인가요? 

 

그러자 첫 질문에 정유진은 자신이 태어난 날인 1995년 3월 20일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한 날이라는 것을 답으로 했다. 출처는 위키백과. “1995년 3월 20일 – 옴진리교 신자들이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두 번째 질문, 파국이나 재난의 개인성과 공통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미지를 캡션과 함께 보여주며 답했다. 정유진이 작업을 시작한 2017년 경의 시점부터 2022년 현재까지 재난, 파국, 재앙은 가까운 타국 일본의 지진에서부터 정치적 파국, 2020년의 코비드(Covid) 19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갱신’되었다. 정유진은 <해적판 미래>를 진행하며 그가 찾아갔던 인터뷰의 스크립트를 보여주며 개별성을 강조한 듯 답했다. 

 

끝으로 컴퓨터 바탕화면 이미지로 바탕화면 이미지를 만든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이미지로 답했다.

 

3

검은 포장지와 ‘사태’ 

 

끝으로 작가 정유진이 현실의 재난과 매스미디어, 개인 SNS를 주시한다는 점을 논해보자. 2019년의 작가 정유진은 관객이 이런 사진을 올린다. 나고야에서 열리고 있는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2019.8.1.-10.14) 찾은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검은 비닐에 정성껏 말려진 거대한 조각상 사진을 올렸다.(@newgenejung) 작품은 신문으로 액자 표면을 덮었는데 정성껏 신경 쓴 형태였다. 작품의 상태는 아이치 트리엔날레 홈페이지에 남아있다.(https://aichitriennale.jp/en/artwork/T10.html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서 일부 작가들은 소녀상이 포함된 《표현의 부자유》 전의 중지에 저항하며 일부 관람을 스스로 금지시켰다. 전시를 보고 정유진에 따르면 작품은 방출되거나 스스로 저항하여 전시장 바깥으로 나오거나 버튼을 꺼버린 것만은 아니었다. 쿠바 출신 작가인 레니에르 레이바 노보(Reynier Leyva NOVO)조각 전체를 검은 비닐로 뒤덮고, 그림을 정부 검열에 관련된 신문으로 둘러싼 채로 전시를 이어 나갔다.” ‘어떻게 보게 해두었는지 보러 가겠다 심야버스를 타고 나고야에 도착했던 정유진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못 보게 한 것을 보기 위해 갔다. “관람객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관객이 될 수도 아이치 트리엔날레 사태 관객 수도 있다.” 

 

 전시 만들기는 하나의 사태가 될 수 있을까? 심야버스를 타고 보러 간 트리엔날레, 그는 무엇인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못 보게 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갔다. ≪RUN≫을 보러 가는 사이 관객들은 더운 날씨와 비 또한 많이 보았을 것이다. ≪RUN≫은 2022년 여름 열린 정유진의 개인전으로 그의 전시는 아주 춥거나 더운 시기 열려왔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전시가 열리는 기간 동안, 서울에서는 100년 만의 폭우가 내렸으니 이러한 과장도 허락되리라. 동시대 미술 전시가 기후와 맺는 관계는 시급한데, 작업 창작으로서 정유진에게 기후는 전시 제작의 조건을 돌파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듯하다. 현실 인식의 대상으로서 날씨는 1980년대 정치와 사회문화적 이슈를 대체하는 사회적 이슈이자 생활이다. 2018년, 자하문로 57-6번지에 위치한 전시공간 시청각에서의 작업은 더운 여름 타들어가는 검은 잔해를 드러냈다. 2019년 아트선재센터를 찾아간 날도 추웠다. 2021년 시청각 랩에서 열린 ≪해류병≫의 바깥 날씨는 영하였고 코로나가 한창이었다. 

 

그것이 재난이든 바깥의 기후이든 정유진은 전시장으로 오기까지 재료를 펼치고 자르고 접붙인다. 그것은 보여주기의 환경을 만드는 일로, 느낌표를 찍는 일로 또 이야기를 경험하는 개인과 사회의 공통성과 파편성을 찾는 일로 이어진다. 조각, 설치, 드로잉, 만화 정유진이 다루는 이 많은 미디어와 재료들의 공통점은 ‘유머의 정신’이다. 이러한 유머를 실체화하는 정유진은 차를 몰고 직접 길로 뛰어든다. 불구덩이 같은 현실일지, 거짓과 폐허가 난무하는 시공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어쨌든 출발한다.



다시 우리가 출발한 이번 전시를 돌아보자. 정유진은 공간 건물 앞의 환경, 전시장 내부의 천정에도 작품을 설치했다. 그의 작업 안에는 유머와 사건의 잔해, 설치할 때 필요한 육중한 덩어리와 조각의 외피가 공존한다. 그의 작업은 여전히 초기(젊은 시기)에 있지만, 여러 겹을 갖고 있는 하나의 시각 언어다.

1. ‘학원’은 소설가 이민진*의 표현이다. 

2. 권혁규, You Better Run! , 뮤지엄헤드, 2022

3. ≪해적판 미래 + 인간백해무익가든≫은 아트선재센터 아트홀에서 2019년 12월 12일부터 15일까지 볼 수 있었다. 4일의 기간동안 영화 상영은 매일 4시, 6시 총 8회였다.

4.  http://eugenejung.com/texts/온전히-가닿지-않을지라도/, 박이주, 온전히 가닿지 않을지라도, 한국예술종합학교 매거진 37호

5. ‘검은 포장지’ 부분은 계간 시청각 3호(2019)에 수록된 글 ‘관객 넘버링’의 마지막 부분을 변형한 것을 밝힌다. 

6. 작가 정유진과의 인터뷰, 2019. 9.9.

7. 전시가 열리는 2022년 8월 2주간 100여 년 만의 폭우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