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주
한국예술종합학교 매거진 37호
“18세기 일본에서는 ‘마츠야마 주노스케’라는 사람이 탄 배가 폭풍우에 휩쓸려갔다. 고립된 선원들의 기록이 150년 후 바닷가로 떠내려와 세상에 공개되었다.”
전시 서문은 해류병과 관련된 일본의 기록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류병을 활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경도 및 위도, 날짜를 적은 종잇조각을 넣고 바다에 띄워 보내면, 이를 발견한 사람은 종이에 적힌 위치와 시간을 이용해 해류의 방향과 속도를 알아낸다. 해류병은 그 특성상 수신이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정유진과 코바야시 타이요(小林太陽)의 2인전 《해류병(海流甁)》에서의 ‘해류병’은 18세기 일본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성격을 띤다. 전시는 2019년 초 일본으로 건너간 정유진 작가가 도쿄의 니시오기쿠보에서 전시공간 중앙본선화랑(中央本線画廊)과 화랑자리(画廊跡地)를 운영했던 타이요 작가를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작가가 기획자이자 협력자의 소임을 다하는 본 전시는 경험하지 않은 타인/타지의 재난을 작업으로 삼는 것에 대한 이들의 대화에서 발전되었다. 이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재난으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동일본대지진을 꼽고, 이 주제를 전시로 풀어내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화는 2020년, 전 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상황을 마주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로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고자 했던 기존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해류병》의 기획에는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전시는 관객을 위한 좌식형 동선 곳곳에 타이요의 두 영상 작업 〈너희들한테서는 언제나 예감이 든다〉(2019)와 〈불상님 안녕하세요〉(2021), 그리고 정유진의 조각 〈Funeral of Eugeene95’s Macbook Pro〉(2021)를 배치하여 구성되었다. 경험하지 않은 재난과 이를 재현하는 일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온전하게 가닿지 못하는 해류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들은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상황 속에서 전시를 통해 해류병을 띄우는 행위에 동참하게 되었다.
사실 이번 전시와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정유진 작가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오던 것이다. 정유진은 그간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재난 상황의 간접적인 경험과 함께 만화나 재난 영화에서의 가상의 이미지가 갖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주목해왔다. 이는 가상과 실재의 구분이 모호해진 동시대 미디어의 환경에서 재난의 인식에 관해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작가는 얇고 부서지기 쉬운 소재로 제작한, 조악한 느낌을 주는 조각의 형태에 이를 반영했다. 가령, 좌식형 동선이나 〈Funeral of Eugeene95’s Macbook Pro〉를 이루는 일부의 질료는 해당 재난 상황과 무관하게 기존에 유통되는 이미지가 바탕이 된다. 마치 콘크리트의 표피만을 떼어 낸 듯한 이미지가 부착된 설치 조각은 구체적인 재난 상황과 무관한 이미지가 모여 건축적으로 구현된다. 이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보는 이 각자가 떠올릴 수 있는 특수한 재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또한, 정유진의 조각이 주는 가벼운 느낌은 재난 상황이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면서 굴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재현 불가능성을 둘러싼 이슈들을 곱씹어보게 한다.
정유진의 초기 작업이 이러한 굴절된 현실과 괴리감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본 전시는 표피에 집중하기보다 직접적으로 경험을 통해 개입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해적판 미래>(2019)에서부터 예견된다. 그는 다크 투어리즘에 대한 관심으로 우크라이나를 찾아 직접 답사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인물들을 만난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재난과 폐허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넘어 그 속에서 생명이나 자연 따위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본 전시 또한 동일본대지진을 둘러싼 작가적 관심이 구체적인 인물과의 만남과 리서치로 이어졌고, 당시에는 예상치 못했던 팬데믹 상황을 거치면서 타이요와의 만남과 대화 자체가 기획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보다 더 현실에 발을 붙여보고 싶어 일본으로 떠났다는 정유진과 타이요가 나눈 ‘경험하지 않은 재난을 말하는 것’에 관한 대화는 코로나 상황 아래 또 다른 차원을 맞이했다. 전시는 수신이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두 육지 사이의 거리를 이으려는 노력들의 만남이고, 굴절될 수 있음을 감수하고 행하는 시도가 된다. 다자통화 형식으로 전개되는 타이요의 <너희들한테서는 언제나 예감이 든다>에서 이시노마키시의 행방불명된 불상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나고, 작가의 노트북에 있던 불완전한 이미지로 구성된 정유진의 조각 <Funeral of Eugeene95’s Macbook Pro>는 코로나 상황 속 기획자, 협력자로서 이들의 만남 안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한다. 개별 작품들이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수신이 불분명한 해류병에 대해 말한다면, 전시는 또 다른 재난 상황 속에서 수신이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해류병을 띄워보내는 두 작가의 시도이다. 이러한 행위는 현재의 상황만이 아니라 과거의 재난과 역사까지도 현재화하며 우리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