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쓰다 요시히로
한국 사람에게 익숙한 재난의 이미지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이미지를 상상할까. 오랫동안 답을 궁금해 해왔던 질문이다. 만일 역사 교과서를 펼친다면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광경을, 교과서에서 얼굴을 들어 바깥세상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쏟아지는 폭우와 홍수, 그 시기를 지나 찾아오는 더위와 가뭄을 상상할 것이다. 혹은 머릿속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외계인이나 좀비가 도시를 점거하는 풍경을 그려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과거의 이미지를 소환하거나 앞으로 도래할 재난을 상상할 겨를 없이 2020년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재난의 이미지를 정복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도 재난이라는 단어가 일상화될 정도로 오늘날 우리는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얼마 전에 <재난의 상상력>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세미나에서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과 재난이라는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동안 내가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져봤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아니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러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지 참가자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코로나 이전부터 한국인에게 실감 나는 재난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나와 코로나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력해져버린 시점에서 이 질문을 받은 참가자들 사이의 간극이 이 침묵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정적을 꿰뚫고 던져진 각종 재난의 이미지들 – 세월호 사건이나 홍수, 포항 지진 등 – 은 나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코로나를 경험한 시점에서 다시금 재난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재난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지구적 차원에서 닥쳐오는 위기 앞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국가 단위로 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이동을 관리(제한)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가 그동안 걸어왔던 글로벌화를 역행하는 흐름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재난 자체가 국경을 뛰어넘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재난이란 국경이라는 인위적인 경계를 서슴없이 뛰어넘어 그 힘을 과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국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특정 재난이 나날이 지날수록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발생하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인에게 낯선 기호에 불과했던 지진이 2017년 포항 지진 이후 더 이상 생소한 단어가 아니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 현실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각종 재난과 호응하듯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재난을 다루는 문학 및 영화 작품들이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다. 물론 최근 재난 관련 문화 콘텐츠의 유행은 한국을 넘어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특히 서구에서) 이 장르 자체가 비교적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좀비’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좀비물’을 필두로 한 각종 재난 상황을 다루는 한국 작품들은 ‘재난물’ 유행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재난에 국경이 없다면, 재난의 상상력 또한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생산되는 재난 콘텐츠가 다른 문화권에서도 환영받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한국의 ‘재난물’이 갖는 고유성(특수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재난이 빈번히 발생하는 현실의 문제와 재난 콘텐츠의 융성이라는 두 가지 현상과 이들의 관계를 신중하게 성찰해보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상력으로서의 재난이 펼쳐지는 문학이나 영화 작품을 단순히 현실에서 증가하는 재난에 대한 거울로만 바라보려는 욕망을 견제하는 것이다. 재난의 상상력이 갖는 실제 재난에 대한 기록이나 재현(모방)으로서의 가치, 혹은 앞으로 다가올 재난을 선취해서 이미지화하는 ‘재난물’의 역할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상상력으로서의 재난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일견 세계적인 유행으로 인식되는 한국의 ‘재난물’ 속에 숨겨져 있는 한국적인 맥락을 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으로서의 재난을 현실의 재현(모방)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한에서, 우리는 재난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려는 강박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 현실에 발생하는 재난(災難)은 때때로 우리에게 어려움(難)이라고 표현되는 것 이상의 흔적을 남기지만, 그것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할 때는 독자나 관객을 슬프게 만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미 재난이 일상화된 현실 상황과 동떨어진 곳에서 픽션으로서의 재난을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지에 대해서 누군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재난을 사유해야만 비로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재난이라는 사건과 그것을 포착하는 시선에 집중함으로써 현실과 허구 속 재난의 관계를 재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이렇듯 현실과 허구 사이에 생겨나는 간극에 주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을 무렵 세미나와 관련해서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2010년),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2013년), 천선란의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2020년), 조예은의 『스노볼 드라이브』(2021년)를 읽게 되었다. 이 작품들을 일렬에 놓고 세밀한 분석을 하기에는 정해진 원고 분량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기회에 양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해당 작품들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발견은 재난을 포착하는 시선을 따라가야만 가능해지는데, 단순한 사건이 ‘재난화’되려면 그것을 재난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번개가 치고 있겠지만 그 현상을 인식하거나 경험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사건을 재난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사건은 (그 사람에게) 재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이라는 강력한 이미지 앞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집중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우선 「물속 골리앗」에는 지속된 장마로 인해 도시를 삼켜버린 홍수, 『밤의 여행자들』에는 베트남의 어느 섬을 습격한 쓰나미,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에는 한반도 비무장 지대에 돌연 발견된 구멍(싱크홀), 그리고 『스노볼 드라이브』에는 피부에 손상을 입히는 눈이 각각 소설 세계를 장식하는 재난으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이러한 재난(자연재해) 앞에서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재난으로 다가가는 몸짓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직접 배를 만들어서 홍수에 잠긴 도시를 배회하거나(「물속 골리앗」), 싱크홀을 조사하는 위험한 일에 자원하거나(「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하는 청년의 움직임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왜 이들은 하나같이 재난(자연재해)과 안전한 거리에 있다가도 결국 스스로 재난 속으로 뛰어드는 선택을 하는가.
재난에서 소설 인물들이 놓이는 상황으로 잠시 시선을 돌려보면, 압도적인 재난의 힘 앞에 서 있는 한없이 나약한 청년들의 모습이 부각된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아파트에서 고립된 어머니와 청년(「물속 골리앗」), 경쟁에서 밀려나 미래가 박탈된 회사원(『밤의 여행자들』), 학자금과 월세라는 경제적 압박으로 괴로워하는 청년(「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그리고 보호자의 부재로 인해 생계의 위협에 노출된 청년(『스노볼 드라이브』)이 어느 날 갑자기 재난(자연재해)과 조우한다. 이와 같이 인물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들은 모두 재난이 도래하기 전에 이미 ‘재난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과 맞이하게 된다. 즉, 소설 속 청년들이 자연재해로 상징되는 재난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은 사실 또 하나의 다른 재난, 소위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재난으로 뛰어들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와 일치하게 된다.
안전한 거리에서 재난을 바라보고 있다가 재난 속으로 뛰어드는 청년들의 위태로운 궤적은, 그들이 서는 자리가 재난(자연재해)으로부터 ‘안전’한 거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 자체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하물며 일상이 재난으로 정의되는 한에서 이들은 애당초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거리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때 말하는 일상이라는 재난은 한국 청년들의 고유한 문제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지만, 그 근간에는 다분히 자본주의 체계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등장하는 재난(자연재해) 자체는 청년들을 위험에 노출시킨다기보다 오히려 일상이라는 재난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일종의 탈출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역으로 더 이상 성장이나 진보를 바랄 수 없거나 출구 없는 반복적인 삶에 지친 인간(청년)의 마음이 상상력으로서의 재난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들이 살아가는 재난적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청년들의 욕망이 결국 재난(자연재해)을 소환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서사의 중점은 재난(자연재해)을 극복하는 것이 아닌, 일상이라는 재난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설정된다. 이 지점에서 네 개의 작품에 드러나는 또 하나의 공통점으로, 재난 후에 도래할 세계가 묘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재난 후 미래의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이렇듯 일련의 이야기들은 재난(자연재해)이라는 사건의 경험을 강조하는 데에 치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간절함과 재난에서 일상(또 하나의 재난)으로 복귀하는 것에 대한 방어에서 비롯된다. 일상이 이미 재난이었다는 관점에서 소설의 결말을 상상해본다면, 소설 속 청년들에게 도래할 재난 후의 세계는 결코 행복이나 희망을 보장하지 않는다.
눈앞에 닥쳐오는 재난을 극복해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일견 긍정적이고 당연한 방향성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여기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그것은 또다시 일상이라는 가면을 쓴 재난으로 회귀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상이 ‘이미’ 재난으로 느껴지는 사람에게 진정한 재난의 종결을 의미하는 ‘재난 후’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유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입해보면, 코로나가 지나고 난 다음에 찾아올 일상은 우리가 원했던 익숙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다소 비관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동안 일상으로 여겨져 왔던 시간이 코로나를 경험한 후에는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재난(자연재해)의 경험은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던 일상이라는 삶의 시간을 새롭게 정의한다.
이렇게 세미나를 통해서 현실의 재난과 상상력으로서의 재난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 ‘재난물’이 급증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단순히 재난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이해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오히려 최근 재난 서사를 다루는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재난이 더 이상 성장을 바랄 수 없는 반복적인 일상의 위태로움을 감지한 마음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재난의 상상력이 만개하는 이면에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표어로 상징되는 성장이나 진보를 확신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현실이 숨 쉬고 있다. 일련의 ‘재난물’은 직접적인 재난의 공포와 더불어 보다 근본적인 일상의 공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결론은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를 다시 한번 두렵게 만드는데,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가 그랬듯이 한국 사회는 일상이라는 재난과 사건으로서의 재난이라는 이중의 재난을 경험하고 있다. 사건으로서의 재난을 극복한다고 해도 그 너머에는 일상이라는 더 근본적인 재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일상이라는 재난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얼핏 봐도 이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이 근본적인 문제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듯 재난을 사유하는 것은 자연재해와 같은 사건과 동시에 그동안 살아왔던 일상이라는 시간을 다시금 성찰할 것을 수반한다. ‘동적’인 재난(자연재해)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는 일상이라는 ‘정적’인 재난 앞에서 지금까지 작가들이 보여주는 몸부림은 드라이브(『스노볼 드라이브』)이자 여행(『밤의 여행자들』)이라는 역동성이다. 이 글이 수록되는 책의 골자를 이루는 정유진의 기획 또한 “RUN”이다. 그렇다면 이 달리는 끝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