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정
복싱에는 누아르 영화 같은 전사(前史)가 있다. 음지의 내기 싸움이 판을 키우다 합법화되기에 이르렀다는 그 이야기를 떠올리자면, 싸울 대상 없는 복싱, 링을 벗어난 복싱은 어딘가 힘이 빠진 모양새다. 오래된 영화와 코믹스, 그리고 팝송에서 심심찮게 그려지던 복싱에는 어김없이 굵직한 결투의 서사가 흐른다. 한편, 허공에 펀치를 날리고 팔을 휘두르는, 정해진 안무로서의 복싱에는 반복되는 움직임만이 있다. 전시 《복싱 스케치》는 전자의 이야기 대신 후자의 이미지를 건져 올린다. 정유진은 이번 전시를 통해 몸짓으로서의 복싱을 복기하며, 그것을 조각적으로(동시에 연극적으로) 구현한다.
그간 정유진은 동시대 재난과 이미지의 문제에 천착해 왔다. “폐허 환상”(전효경)이라 요약되기도 했던 그의 재현은 그러나, 풍경으로서의 폐허 취향과 같은 서구의 미적 전통을 환기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어김없이 미감을 발휘하고 마는 판타지 픽션과 거기 길들여진 취향의 공동체를 좌절시키면서, 정유진은 이미지가 재현을 앞지르는 전도된 오늘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불확정적인 미래의 기억”(윤원화)으로 정리된 재난들의 인용(체르노빌, 후쿠시마, 그리고…)에 있어서는, ‘언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불안을 야기하는 미래나, 그런 의미에서 이입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를 소비하는 대신, 항상적인 현재로서 그것에 주목해 왔다.
재난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난의 이미지가 너무도 자주, 많이 노출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산처럼 쌓인 이미지의 집합을 두고, 쓰나미로 쓸려 내려간 삶의 흔적들이나 전쟁의 참화 속에 둔덕을 이룬 잿더미를 떠올리기는 얼마나 참담할 만큼 용이한가. 그러한 와중에 정유진은 재난과 비극을 증명(증언)하거나 재현하는 문제에서 다소간 비껴서, 재난과 이미지의 관계를 고민한다.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 오늘날 재난의 위상과 공명한다. 달리 말해, 그가 작업의 제목에 쓰기도 했던 “해적판”의 위상에 둘을 놓고 견주는 것이다. 공공연히 돌아다니는 “해적판” 복제성은 (1) 진본의 인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제’로서(해적판의 수요는 ‘그것’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보여준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2) 동시다발적으로(공시적으로 현재에) 존재한다. 진위를 가르거나 가부를 판별하기도 전에 덮쳐 드는 일상적인 것으로서 말이다.
이번 전시의 전면에 내세워진 ‘복싱’은 이와 같은 작가의 입장을 그럴듯하게 유비한다. 일주일에 몇 번 정해진 시간 동안 이곳 복싱장에서 몸을 푸는 작가는, 스파링을 하거나 샌드백을 두드리지 않고 다만 움직임의 형식을 익히고 몸짓을 되풀이한다. 복싱장에서 그가 상대와 겨루기를 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다시 말해, 정유진이 자기 신체로써 또는 조각으로써 몸을 형상화할 때,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한 예비적 행위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에게 복싱이 훗날의 승리를 위해 펀치를 가다듬는 일이 아니듯, 그의 작업에 있어 재난–이미지는 그것이 구체적인 지시/재현 대상을 조준하고 있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드러나는 양상 자체가 관건이 되며, 이곳에선 어떤 시간도 유예되거나 앞당겨지지 않고 현재적 운동 상태로서의 이미지가 주목된다.
하지만, 《복싱 스케치》는 출구 없는 오늘을 계속 달려 나가거나(《RUN》, 2022, 뮤지엄헤드, 서울), 극장과 현실이 혼재된 뒤집힌 완전 영화(cinéma total)를 그리는(《해적판 미래 + 백해무익가든》, 2019, 아트선재센터, 서울) 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작가는 이제 무엇을 혹은 어떤 이미지를 구제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마주한다. 《복싱 스케치》는 정유진 작업 세계 전반을 가로지르던 재난–이미지로부터 위상 변환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상상하며, 모종의 시도에 앞서 한 가지 실험을 자처한다. 현재 현실의 단위를 이루는 ‘재난–이미지’는 자리바꿈을 이뤄낼 수 있을까?
《복싱 스케치》는 다른 무엇도 아닌 ‘조각’에 집중한다. (최근 새로이 시도된 일련의 작업들(〈Earthmovers〉(2024))에서 조각의 조형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복싱장 한 가운데를 차지한 〈Friends (원–투–훅–어퍼–위빙–롱)〉(2024)는, 레디메이드 오브제와 작가의 과거 작업을 상기시키는 소재를 활용해 만든 조각들이다. 각각은 인체를 단위 삼는 조각적 부피를 지니고 있으며, 원, 투, 훅, 어퍼 등 복싱 동작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을 기본 원리로 제작되었다. 즉, 〈Friends〉의 개체는 일련의 동작을 수행하는 한 사람의 체적을 담아내고 있다. 말하자면 ‘인체 조각’으로 구현된 작품은 (재료가 낡은 듯 보이도록 마감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라도) 임시적으로 가설된 양 보이기는 하되, 독립된 조형적 단위를 구성한다.
여기서 보는 사람이 팔을 아래에서 위로 올리거나 몸을 들어 올려 길게 뻗는 등의 동작을 무리 없이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어떤 움직임의 반경을 선으로 따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먹이 날아오르는 만화적 장면을 펼쳐 놓은 듯한 〈사각의 정글〉(2024)에서 이는 더 잘 드러난다. 이어 샌드백을 감싸고 있는 각기 다른 드로잉 세 점(〈솜주먹 샌드백〉, 〈물주먹 샌드백〉, 〈불주먹 샌드백〉(2024)) 역시 유사한 방법론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보인다. 이때, 각각의 이미지가 그래픽의 평면성이나 선적인 속도감을 표방하고 있지만, 인체 스케일로 육박하는 조각의 부피가 현전성과 공간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복싱 스케치》에서 조각은 몸체와 몸체들의 사이 공간을 상기시키면서 그 틈에 보는 사람을 적극 개입시키는 연극성을 띤다. 정유진은, 국내에서 치른 두 번의 개인전은 물론이고, “’전시행위’와의 잠재적이며 복합적인 연관성 안에서”(권혁규) 작업들을 배치하며 어떤 장면(scenery)을 구성해왔다. 그가 꽤 긴 호흡의 영상/영화를 다루곤 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단일 작품의 내적 완결성과 그로 인한 현재적 몰입 대신 현장/현존의 연극성을 마련하는 면모는 정유진의 조각, 그 확장된 설치의 특징이라 말해볼 수 있다.
전시는 복싱짐(Boxing Gym)이라는 매우 특수한 환경에 작품과 관객을 끌어들였다. 이로써 한층 극화된 조각의 연극성은, 관객 또는 복싱장 이용객의 신체가 작품에 개입하기를 자연스레 유도하고 그로부터 전체 장면의 이해가 작동하도록 설정한다. 반쯤은 일상적으로 반쯤은 미학적으로 전시와 작품에 접근하게 될 어떤 보는 사람은, “집단적 신체”(권혁규)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한 신체로서, 눈 앞에 놓인 것들을 독해해내야 한다.
현재성(presentness)을 전복하는 연극성의 현존(presence)은 오늘의 재난/이미지를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행시킬 실마리를 제공한다. 일상의 훈련소인 동네 복싱장에서, 작가 자신과 아마추어 복서들이 뜀을 뛰고 주먹을 던지는 몸짓이 조각으로 장면으로 편입된다. 이야기 없는 이미지는, 이미지 스스로 호소하는 감각을 복구할 수 있을까? 이전의 상태를 되돌리거나 폐허에 새순을 돋게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닌, 지금 이곳의 현존을 일깨우는 ‘복구’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쩌면 재난–이미지 이후를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