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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보이(기만 하)는 것들: 기록의 파탄을 예기하는 허물로서의 이미지

콘노 유키

정유진 «적어도, 현실답게» (2019, 화랑자리)

스펙터클이 소비될 때 일정한 거리감이 전제된다. 실제 눈앞에서 일어났으면 말려 들어가는 것과 달리, 사람들은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충격적인 이미지를 감당할 수 있다. 이때 대상화된 이미지들은 즐기려고 다가갈 수 있고 적극적으로 몰입하다가 슬쩍 빠져나올 수 있다. 영화나 동영상처럼 오로지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스펙터클과 최근의 VR이 유사-체험을 제공하듯이 대상화된 장면을 경험하는 방식은 거리를 확보해주면서 경험자에서 감상하는 체험자로 만든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보는 충격적인 장면은 현실과 거리를 통해 감상된다. 화면을 끄거나 장치를 벗으면 체험적 감상자는 그것이 가짜 혹은 현실의 복사본이었음을 인식한다. 이 둘의 구분은 대단히 모호하고 판별할 수가 없다. 뉴스의 한 장면인지,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인지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채 스펙터클은 전달된다. IS가 편집해서 만든 살해 영상보다 유튜브에서 보는 교통사고 장면이 아무리 현실의 노이즈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공통적으로 화면이나 사진 너머의 현실은 현실 자체의 경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달되는 매체에 머문다.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영상(푸티지)이건 영화 속 가상의 세계가 붕괴하는 장면이건, 공통적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바가 아니다. 단지 거리감의 차이일 뿐이지 스펙터클은 내가 경험하는 지금 이때 이곳에 뿌리 박혀 있지 않다.

감상용 체험은 작가 정유진의 관심사와 작업에 반영된다. 작가는 만화를 비롯해 대중적으로 공유되는 재난이나 재해의 장면에 관심을 가져 얇고 부서지기 쉬운 소재로 표현한다. 이러한 특징은 화랑자리에서 열린 <적어도 현실답게>에서 동명의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는 8년 전의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의 폐허를 허약한 재료들(예를 들어 플라스틱 단보루/박스)로 전시공간에 구축한다. 정유진의 작업을 보면 인공적이거나 가짜이고 또 허약하고 견고하지 않은 가벼운 재료가 종종 사용되는데, 표현방식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스토리에 주목해서 만든 작업이 있다. 예를 들어 <애프터 10.12>(시청각, 2018)에서 소개된 ‘인간백해무익가든'(2018)과 비교적 최근에 두산아트센터에서 선보인 ‘문어 점쟁이 파울의 부활'(2019)를 보면 작가는 어떤 내러티브나 스토리와 같은 참조항을 출발점 삼아서 작품으로 만든다. ‘문어 점쟁이 파울의 부활’은 작가가 본 다큐멘터리 ‘점쟁이 문어 파울의 일생’(2012)에 착안하여 풀어본 작업이다. 독일 어느 수족관에서 월드컵 경기 결과를 예측하는 문어를 키우는데 다큐멘터리를 보면 죽은 이후 유골함까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간백해무익가든’의 경우는 조선시대 주초위왕사건과 관련된 사건을 참조하여 제작되었다.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벌레가 갉아먹은 잎에 문구가 나와 하늘에서 예언이 내려졌다고 전해진다. 두 가지는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의 어리석음이나 우스움을 보여주는데, 작가 또한 지어내는 태도로 성사되지 않은 예견, 그러기에 더 우습게만 보이는 예견을 형상화한다. 파울은 죽은 이후 부활하지 않았지만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리고 가짜 식물은 플라스틱을 먹는 곤충(로봇 곤충?)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이 죽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친환경이다!’라는 예언을 통해 도래할 종말론적 풍경을 이미지-화/상상(imagination)하여 작품에 풀어낸다.

 

두 작업에서 ‘먼 미래에 그럴지도 모르는 일’을 상상하여 현재에 ‘예견’처럼 보여주는 방식은 ‘동굴벽화'(2018)와 ‘자라는 묘비'(2018)와도 공통되는 특징이다. 전자는 지금의 서울의 모습을 물질적으로 스티로폼에 기록하며 남기고, 후자는 땅에서 묘비가 어떤 식으로 성장을 하는지 연이어 열린 두 번의 전시(시청각 <애프터 10.12>에 이어 열린 175갤러리의 <슈퍼포지션>)에서 보여준다. <자라는 묘비>는 첫 번째 전시에서 마치 바닥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전시장 바닥에 놓였다가, 두 번째 전시에서 단순히 같은 재료로 키를 키우지 않고 마치 연명 수술을 받은 듯이 철제 막대를 붙여 높이를 올렸다. 이때 묘비가 자란다는 애초의 기묘한 전제는 다른 재료를 추가함으로써 묘비보다 더 복합적인 형태로 성장한다. 작품 자체의 완결성을 거부하면서 마치 육면체 주사위를 던지면 1도 3도 안 나오고 7이나 알파벳 문자가 나오는 바와 같이 작품은 ‘상상’을 통해 정해진 조건 (즉 묘비가 곧 묘비여야만 하는) 내의 확률 너머에 수없이 존재하는 가능성을 ‘이미지화’ 하여 보여준다.

이번 작업 역시나 재료적인 측면에서 그전의 작업방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우화의 재현방식보다는 조형적인 측면을 통해 스펙터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앞서 예시로 든 작업이 어떤 예견을 선취하여 작품으로 보여줬다면, ‘적어도 현실답게’는 제목에 반영된 것처럼 현실과 그 복제본, 그리고 가짜 사이의 관계에 더 주목하여 스펙터클을 소비/감상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친구에게서 동북 대지진 폐허가 찍힌 20기가가량의 이미지를 받아 참조하면서 그 풍경을 전시장 내부에 만들었다. 제작방식과 관심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현실답게’는 2018년 175갤러리에서 선보인 ‘Phantom Mutant’ 시리즈(2018)와 공통된다. ‘Phantom Mutant’는 SNS로 돌아다닌 밈, 바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지역에 지금 이런 동물이 돌아다닌대!” 하는 식으로 (잘못) 유포된 파노라마 에러 사진에 착안하여 몸체가 길어진 고양이와 여우를 종이로 만들었다. 이번 전시의 경우 사진에 찍힌 이미지를 가벼운 재료를 다룬다는 점에서 ‘Phantom Mutant’와 공통된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견적으로 선취해서 보여주기보다는 사진에 기록된 사실이 제 시공간에서 멀어져 가 다르게 이해되는 과정을 포착하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신체가 늘어난 고양이의 모습은 원전 사고의 증상으로 오독되고 쓰나미 피해를 입은 폐허는 세팅장으로 인식된다. 이런 상황을 참조하면서 작가는 기록된 이미지는 현실/사실로 연루되거나 거짓이나 관련 없는 맥락 사이를 부유하는 점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경우는 작품 옆에 설치된 아이패드를 통해서 자료를 바탕으로 작품이 제작된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아이패드로 볼 수 있는 20기가짜리 수많은 폐허의 사진은 세팅장처럼 다가와 구체적인 사건과 “실제인가?” 하는 의혹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로 현실적일까? 어떤 장면을 그대로 담았고 해상도와 화질이 좋은 점에서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보지 않는 장면은 관람자에게, 현실에서 괴리된 것처럼 느낀다. 기록물로 전달될 때 전제되는 거리감에 이어 사진을 볼 때 그것이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장면인지, 현실 무대에 세워진 연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쉽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현실과의 괴리는 공간과 시간 모두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작가가 다루는 폐허의 속성(이하 폐허성)과 관련이 깊다. 실제 공간에서 이탈된 스펙터클은 기록된 시간에서도 이탈되어 소비대상이 된다. 시간적 이탈은 폐허에도 나타난다. ‘지금 이곳’에 있는 폐허는 ‘과거의’ 지표로서 존재한다. 시간을 돌리면 폐허는 과거에 폐허로 있지는 않았고 그 말은 폐허는 애초에 폐허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의 경과를 거쳐 나타난 폐허는 원래 사람이 살고 있었다가 기능이 폐기되어 점차 썩어가면서 붕괴하는 공간이고, 동북대지진 관련해서는 어떤 사건과 피해의 지표적인 역할을 지닌다. 가랑이 찢어지듯 현재라는 위치에서 거리를 벌려 폐허는 시공간에서 이탈되어 과거로 등장하며 거리감을 통해 스펙터클로서 공유된다. 그의 작업에서 만들어진 폐허는 일차적으로 공간적인 거리/거리감을 통해, 그리고 이차적으로 시간에서 괴리된 폐허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폐허가 폐허로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작업은 폐허 자체를 만들지 못하고 오로지 전달되고 공유된 이미지의 표피나 허물을 떼어내듯이 제작된다. 전시공간을 압도하긴 하지만 그의 작업은 VR만큼 몰입할 수 없고 쓰나미의 영상기록, 더 나아가 전시장에 비치된 아이패드 속 사진보다 더 멀리 현실에서 떨어져 있다. 시공간 축에서 멀어진 폐허를 이번 전시를 통해 전시장에 재현하려는 그의 태도는 실재하는 폐허를 만드는 일에 실패하고 허물을 만든다. 이 부분이 바로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작품은 스펙터클로 매혹시키고 폐허에 몰입시키지 않고 시공간적인 괴리감을 짚어주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정유진의 이번 작업은 이미지의 빈약한 존재 방식을 다루면서 조형물을 통해 기록하는 일의 빈약함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 참조된 쓰나미 피해를 입은 지역의 이미지는 실제 시공간의 기록이자 쓰나미를 대변해주는 지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크라카우어가 일찍이 예견했듯이) 여기서 기록된 사실은 뒤받쳐주기 힘들어질 때 유행, 즉 시기가 지나면 더 이상 의미 없는 장식처럼 해석되고 만다. 기록의 허약함은 사진뿐만 아니라 조형물의 경우, 특히 기념비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사건의 지표적 역할을 담당하는 기념비 역시 맥락에 의해 뒷받침된다. 실제 있던 사건의 흔적을 기록하는 경우에는 그 특성이 더 직접적으로 반영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총알 자국과 같은 사건 자체의 흔적보다는 사건을 상기시키는 지표 역할로서 기념비는 제작된다. 작가는 기념비의 기록성을 조형물을 통해 보여주지만, 사진과 기념비가 둘 다 갖는 기록과 전달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때 일어난 현실을 기록하려고 또 전달하려고 사진이나 기념비를 남기지만, 시공간적으로 멀어져 갈 때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그 결말을 예견적으로 미뤄보아 대비하는 자세로 현재에 기록하는 태도가 사진과 기념비에 있다면 정유진은 ‘그 결말’을 다룬다. 바로 작품은 전달의 파탄을 예견하여 보여준다. 기록할 수는 있어도 전달을 통해서 맥락이 이탈되고 또 다른 해석으로 뒷받침되는 빈약함은 이미지로만 남는다. 따라서 이번 작업에서 보존과 기록의 위상은 맥락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의 빈약함으로 위치된다. 어떤 사건이나 인과관계를 지표적으로 기록하는 기념비도 이때 이곳을 기록하려고 찍은 사진도 아닌, 맥락이 떨어져 나가거나 새로 결합하여 다른 의미를 형성하는 이미지, 즉 현실 시공간에서 점점 떨어져 나간 허물로서의 이미지를 기록한다. 그런 의미로 <폭삭벽>(2017)은 구체적인 맥락에서 가져온 벽돌의 이미지도 아니지만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맥락의 있어 보임으로 해석되는 작품이다. 동북 대지진의 폐허를 상기시키지만, 작가는 이 작업에서 구체적인 참조항 없이 콘크리트 질감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내어 종이에 출력하여 보여준다. 그 질감 자체는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인 작업을 하다가 검색하면 나올 만한 소재이고 어떤 의미가 원래 있지 않다. 그런데 전시공간에서 쌓이고 또 전시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이 작품은 물질적으로 부서지기 쉽고 배치 또한 유동적으로 변하는 특징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이미지 자체의 빈약함—그러기에 어떤 경우에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이미지가 되는—을 나타낸다. 관람자는 작품을 보고 지진이나 구체적인 사건을 떠올릴 수 있지만 실상 이미지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았는데도 다른 맥락으로 이어진다.

 

시공간을 벗어나고 또 이탈되어 해석의 부재와 해석의 부여를 겪는 빈약한 이미지는 이미 괴리된 상황에 괴리가 더 생겨 스펙터클로 소비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래도 남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허물과 같은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허물이 그렇듯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단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독과 다른 맥락을 부여받아 현실에서 멀어져 간다. 작품 ‘적어도 현실답게’는 사진의 존재 때문에 이미지가 동북 대지진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에 뒤받쳐져 가상의 무대가 아니라 현실을 드러낸다. 기록 자료인 수많은 사진과 작품의 배치와 원본-복제의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그래도’ 현실 시공간에 가까이 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의 어떤 사건, 그 사건을 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기록, 그 기록된 이미지를 보고 재현한 작업, 이 세 가지 항의 관계에서 동북 대지진의 폐허는 점점 현실 시공간에서 벗어나 피해가 거의 없었던 도쿄도 니시오기쿠보의 한 전시공간에 위치된다. ‘적어도 현실답게’는 이미지의 유통과 확산에 따라 현실의 시공간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원초적으로 가지는 (맥락의) 기록 불가능성, 그에 따른 전달 불가능성을 짚으면서 그런데도 남는 허물로서의 이미지에 기록자료를 통해 현실을 간신히 보여준다.